영국의 브리스톨에 가면 낙서가 되어 눕혀져 있는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상을 통하여 영국의 아픈 과거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브리스톨은 영국 남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이곳에 가면 '브리스톨 시민들이 이 도시에서 가장 고결하고 현명한 아들 중 한 명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에 세운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빈 주춧돌을 장식하고 있는 검은 명판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명판에서 말하는 '가장 고결하고 현명한 아들'은 과거 많은 아프리카인 노예를 관리 감독했던 상인 에드워드 콜스턴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노예무역에서 콜스턴의 역할은 무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수익으로 고향인 브리스톨에 학교, 교회,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의 자선 활동을 펼쳤고 그가 사망한지 2세기가 지난 후에 사람들은 그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2020년 미국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숨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기 위해 열린 집회에서 이 동상은 철거되었습니다. 집회 도중 성난 시위대의 일부가 에드워드 콜스턴의 이름을 딴 콜스턴가로 몰려가서 동상에 밧줄을 걸고 콜스턴의 동상을 끌어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습니다.
이는 자유롭고 종종 반항적이 시각으로 유명한 브리스톨에서 어두운 과거를 직시하려는 열망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브리스톨이 역사를 재평가하면서 방문객들은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을 탐구하는 투어와 브리스톨의 현대 다문화 커뮤니티를 위한 산책로를 통해 도시를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롭 콜린은 투어가이드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를 탐구하기 위해서 노예 무역 산책로를 개발하였습니다. 책을 더 많이 읽을수록 노예무역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어떻게 브리스톨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브리스톨 자체에 발을 디딘 노예는 거의 없었지만,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상품을 운송하고 노예가 된 아프리카 인을 아메리카 식민지로 보내고, 담배, 설탕, 코코아 같은 상품을 유럽으로 가져오는 삼각 무역의 혜택을 누렸던 도시라고 합니다. 브리스톨 선박은 노예무역이 폐지될 때까지 약 486,000명의 노예를 인신매매했으며, 브리스톨은 리버풀과 런던에 이어 영국에서 세 번째로 큰 노예 무역항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중심에는 콜스턴이 있었습니다. 1636년에 브리스톨에서 태어난 콜스턴은 런던시의 상인들과 스튜어트 가문이 합작하여 설립한 왕립 아프리카 회사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는 왕립 아프리카 외사의 이사를 역임하고 후에 부총재가 되었습니다.
약 84,000명의 아프라카인이 치명적인 조건에서 아메리카 대륙의 설탕, 담배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이송되는 동안 콜스턴은 자신의 부를 사용하여 브리스톨 대학과 콜스턴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숙소를 제공하는 하우스를 서립하고 병원에 자금을 제공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콜스톤은 왕립 아프리카 회사에서 2인자, 영국 전체 노예무역에서 2인자였습니다. 이것은 에드워드 콜스턴의 손에 피가 묻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립 아프리카 회사의 독점이 깨짐 1698년부터 브리스톨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상당수는 노예무역이나 설탕, 담배, 코코아와 관련된 노예 경제를 통해 직접 재산을 모았습니다. 노예제 폐지법 이후에는 소유주들은 영국 정부로터 막대한 금액을 보상받았고 그 결과 브리스톨에 더 많은 현금을 투자할 수 있었으며, 그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눈에 띄게 남아있습니다.
콜스톤외에 또 다른 유명한 아들 중 한명은 농예가 재배한 코코아를 브리스톨로 수입하여 영국에서 초콜릿을 먹는 것을 상업화하고 결국 캐드버리와 합병한 회사를 설립한 조셉 스토어스 프라이입니다.
콜스톤이 죽은지 200년이 지난 후에 동상을 세운 사람들은 실제 콘스턴과는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제도는 외면하고 콜스톤이 한 좋은 일만 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어두운 면은 19세기 브리스톨에서 매년 '콜스턴의 날' 기념행사를 열었던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이 홍보하고자 했던 자선적인 이야기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으로의 이민이 증가하면서 브리스톨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점점 더 다양해지는 지역사회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브리스톨의 아프리카계 카리브해 커뮤니티는 전통적으로 세인트 폴스 교외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으며, 방문객들은 한 대학교에서 큐레이팅 석사 과정을 공부할 때 디자인한 셀프 가이드 도보 투어를 통해 도시의 흑인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장소를 탐험할 수 있습니다. 브리스톨에는 '세인트 폴의 일곱 성인'을 기니는 다채로운 벽화가 있습니다. 브리스톨의 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고용 관행에 항의하고 1963년 브리스톨 버스 보이콧에 참여하여 이후 영국에서 인종관계법 통과를 직접 이끈 오드리 에반스, 바바라 디터링 등 7명의 지역 흑인 운동가를 그린 벽화입니다.
세인트풀의 흑인 역사를 지도했던 바는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며 특히 브리스톨과 같은 도시에 있는 다양한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이러한 다양한 역사를 이해하도록 도와 관점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콜스톤거리'와 같이 자신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긴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이리이지만 도시에서 가장 많은 자선을 베푼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과거 사람들을 노예로 보내는 일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M-Shed의 최상층 전망대에서는 1999년에 문을 연 페로 다리가 보입니다. 이 다리는 브리스톨의 부유한 상인이 아니라브리스톨로 끌려온 아프리카 노예 페로 존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2017년도에는 콜스턴 홀 음악 공연장은 "브리스톨 비콘"으로 브랜드를 변경하기로 결정하였고, 2018년도에 브리스톨 시의회는 노예무역에서 콜스턴의 역할을 설명하는 악명 높은 동상에 두 번째 명판을 추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브리스톨의 비지트 웨스트의 전무이사는 브리스톨은 강하고 반항적이며 독립적인 정신이 있어 협력적이면서도 혁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항적인 행보는 2020년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시위가 한창일 때 콜스턴의 동상이 쓰러지면서 더욱 확고해졌으며, 많은 기관과 기업이 콜스턴 이름과의 관계를 끊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상 철거와 브리스톨 기관의 이름 변경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보수 정치인들은 이러한 브리스톨의 변하를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표현했고, 많은 우파 뉴스 매체는 콜스턴에 대한 재평가에 대해서 콜스턴이 브리스톨의 역사에서 지워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의 도덕으로 역사적 인물을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노예 상인이자 자선가인 쓰러진 동상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해서 브리스톨 시민들에게 물었습니다. 항구에 그래로 둘 것인지, 아니면 다시 세울 것인지 물었고 동상은 낙서를 그대로 보존한 채 보관하기로 결정되었고 현재 M-shed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역사적 맥락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2년 전에 일어난 일이 브리스톨 사람들 역사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캄보디아 실크의 유지 (0) | 2023.07.18 |
---|---|
스위스의 중력 무시 솔루션 (0) | 2023.07.18 |
앙코르: 아시아의 고대 '수압 도시' (0) | 2023.07.17 |
포트 로얄의 새로운 변화 (0) | 2023.07.16 |
잃어버린 도시의 영원한 매력 (0) | 2023.07.15 |